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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90년 유럽 여행에서 문화의 힘을 보았고 사표 후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시작하였다. 그렇게 35년의 공간에서 많은 시행착오 끝에 지금 35년의 나무 그늘에서 아열대성 기후를 피하고 있다. 내 나이 30때 연천군 최전방에 터를 잡고 길도 전기도 없는 산속에 땅을 샀다고 부모님의 꾸지람도 들었지만 내 눈에 콩깍지는 아직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. 4년의 짧은 교직에서의 보람도 좋았지만 내 인생과는 바꿀 수 없었기에 주변의 의아함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일당 3만원의 농장일부터 시작하였었다. 다행히 같이 일 다니던 동네 아저씨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공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. 지나고 보면 순간인데 돌이키면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. 예술가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았다면 나는 다시 시작하지 않을 듯 하다. 이혼 후 중국 황산 여행에서 마지막 날 감동이던 운해가 물러난 절벽에서 느낀 고소공포증과도 같았다. 그러고 보니 예술은 감동과 공포를 동반한다. 이후 민통선 예술제를 국제전으로 확대하였고 군부대의 후원으로 우리들의 예술혼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지만 20년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하였었다. 권력자의 음악회에 수억원이 지원되는 현실을 보고 그동안 참여해준 작가들과 운영진들에게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움에 더 이상은 힘을 얻을 수 없었다. 이후, 백열등 조명 아래 통기타 무대에서 더 큰 감동을 보았고 그렇게 예술제는 우리들 마음속에서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. 지금의 아내는 나의 꿈을 완성 시켜준 큰 은인이다. 고무줄 당기며 달리던 과거에서 이제 나를 안고 달려준 아내 덕분에 나의 나무 그늘과 그녀의 꽃밭이 어우러졌다. 소 시절 작품만 할 수 있음이 소원이였음에도 지금은 작품하나를 두고 3년을 붙들고 있다. 내 머리맡에 항상 두고 보고 있는 저 작업이 언제 마무리 될지는 모르지만 과거처럼 조급하게 완성 시킬 이유가 없다. 물론, 내일은 나도 모른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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